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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캐스트] 라보에티, 자발적 복종

w우주z 2013. 12. 5. 17:26

왜 자유를 내던지려할까?

페르시아의 장군이 스파르타 사람들을 만났다. 장군의 눈에 스파르타인들은 안타깝기만 했다.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에 맞서다니, 도대체 제 정신이란 말인가. 장군은 진심을 담아 충고를 던졌다.

“우리 왕에게 복종하게. 그러면 왕의 품 안에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다네.”

스파르타인들은 장군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당신은 자유가 어떤 맛인지, 얼마나 달콤한지 모르오. 당신도 자유가 뭔지를 깨닫는다면 창과 방패뿐 아니라 이빨과 손톱을 써서라도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울 것이오.”

자유를 잃은 인간은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라. 놀랍게도, 스스로 노예가 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듯싶다. <출처: Wikipedia>

장군과 스파르타인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헤어졌다. 둘 가운데 누가 이겼을까? 승리의 여신은 스파르타가 속한 그리스의 편이었다. 16세기 유럽의 지성인 라보에티(Étienne de La Boétie:1530~1563)는 스파르타가 이긴 까닭을 이렇게 설명한다. 자신의 자유를 지키려는 이들은 목숨 걸고 싸운다. 자유를 잃는 순간 모든 것을 잃기 때문이다. 상대의 자유를 뺏으려는 이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조금만 피를 보아도 금방 용기를 잃는다. 이익보다 손해가 크다면 굳이 상대방과 싸울 이유가 없는 탓이다.

인간에게 자유는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 자유를 잃은 인간은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라. 놀랍게도, 스스로 노예가 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듯싶다. 자유 따위는 기꺼이 내던져 버리고 힘센 자 밑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라보에티는 이러한 모습에 혀를 찬다. 왜 사람들은 스스로 힘센 자에게 고개 숙이고 복종하려 하는가?

길들여진 말은 달아나지 않는다

라보에티 <출처: Wikipedia>

이유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라보에티는 말한다. “엄청난 전쟁의 고통과 당면한 재난은 인민들의 비판력을 마비시킨다.1)” 세상이 신산스럽고 두려울 때, 먹고 살 길이 막막할 때, 우리는 자유보다 생존에 마음이 더 끌리곤 한다.

강한 자의 보호 아래 들어가면 우리는 과연 더 안전하고 행복해질까? 라보에티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는 야생마를 예로 든다. 처음 고삐를 채우고 안장을 얹을 때, 말(馬)은 길길이 날 뛸 것이다. 하지만 길들여진 다음에는 자신의 처지를 고분고분 받아들인다. 심지어 도망칠 수 있는 상황이 생겨도 말은 달아나지 않는다.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을 뿐이다.

마침내 말은 자신을 부릴 누군가가 나타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상태에까지 이를 테다. 스스로 살아가는 법을 잊어버린 탓이다. 물론, 새로운 주인은 자신을 마음껏 이용해 먹을 것이다. 그래도 말은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주인은 자신을 먹이고 돌봐줄 테다. 그러나 왜 말을 보살피겠는가? 말을 부려먹기 위해서가 아닌가? 이용 가치가 사라진 순간, 주인은 말을 내칠 것이다. 그러니 말은 더더욱 주인에게 고분고분해질 수밖에 없다. 말의 처지는 우리의 현실과 얼마나 다를까?

“인간이 자유를 잃으면 용기 또한 상실한다. 노예로 살아가는 인민들에게는 투쟁 욕구도 없고, 강인함도 없다....... 원래 자유를 품은 사람은 어떠한 위험도 아랑곳하지 않고, 동지들과 함께 고귀한 명예를 위해서 장렬하게 자신의 몸을 바치려고 생각하지 않는가? 자유로운 인간들은 고결하게 투쟁하며 싸워 나간다....... 이에 반해서 노예들에게는 투쟁의 용기도 없고, 다른 모든 사람들의 안녕을 위한 살아 있는 희생적 충동력도 없다. 노예들은 소심하고 나약하며, 위대하게 행동할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래, 독재자들은 이를 분명히 꿰뚫고 있으리라.”- 에티엔느 드 라보에티 지음, 박설호 옮김, [자발적 복종], 울력, 2004, 64쪽

소신을 잃고 윗사람의 눈치만 보게 된다면, 뭐가 옳고 그른지 따지기보다 어느 쪽이 더 나에게 이득이 될 지만을 계산하고 있다면, 라보에티의 경멸에 찬 눈빛을 떠올릴 일이다.

노예보다 못한 삶이란

심복들끼리의 경쟁은 늘 치열하기 마련이다. 끊임없이 서로를 헐뜯고 깎아 내린다. <출처: gettyimages>

하지만 줏대 있게 살기는 쉽지 않다. 고개 숙이고 강력한 주인 밑에 있는 편이 더 안전하고 편안할 듯싶다. 라보에티는 이런 생각에도 결연하게 반대한다.

독재자에게 충성하는 신하들을 보라. 그들은 자나 깨나 주인 마음에 들려고 애쓴다. 주인의 생각을 읽으려 항상 긴장하고 있으며, 주인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기 사생활도 포기한다. 심복이 되어야 자신도 부와 권력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삶이 과연 행복할까? 라보에티는 이들의 삶이 노예보다 못하다고 잘라 말한다. 노예들도 일을 마친 뒤에는 휴식을 취하며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심복들은 몸도, 마음도 하루 종일 주인 곁에서 떠나지 못한다. 이럴수록 그들은 자신의 본래 모습과는 멀어진다.

그뿐이던가. 심복들끼리의 경쟁은 늘 치열하기 마련이다. 끊임없이 서로를 헐뜯고 깎아 내린다. 이들은 결국 홀로 살아갈 때보다 더 격렬한 생존 경쟁에 휩싸일 테다. 이들은 주인이 꾸리는 조직 밖에서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을 잊어 버렸다. 주인이 자신을 내치면 끝장이다. 살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자신을 내던지고 주인에게 매달려야 한다. 이들이야 말로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어버린 사람들 아닌가?

자유도 훈련해야 누릴 수 있다.

‘회사형 인간’으로 평생을 살다가 갑자기 조직에서 밀려난 이들을 떠올려 보라. 이들에게 넉넉한 시간은 ‘자유’가 아니다. 오히려 주체하지 못할 부담일 뿐이다. <출처: gettyimages>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인의 조건으로 ‘스콜레(scholē)’를 꼽는다. 스콜레란 ‘여가(餘暇)’라는 뜻이다. 여가는 시간이 남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다 해서 절로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회사형 인간’으로 평생을 살다가 갑자기 조직에서 밀려난 이들을 떠올려 보라. 이들에게 넉넉한 시간은 ‘자유’가 아니다. 오히려 주체하지 못할 부담일 뿐이다.

그래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나선다. 충분히 먹고 살만하다 해도 다르지 않다. 일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고통으로 다가온다. 직장 생활이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도 이들은 자신의 상태에서 벗어날 생각을 못한다. 힘겨운 노동도 고통스럽지만, 일이 주어지지 않는 상태는 더 괴롭기 때문이다.

자유를 누리는 능력도 연습하고 훈련해야 갖출 수 있다. 취업이 힘든 시대다. 직장 안에서의 경쟁도 치열하다. 나를 써줄 이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온갖 스펙들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마음은 늘 초조하고 일상은 정신없이 바쁘다.

자유인으로 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자유를 내던져 버리고 강력한 누군가의 밑에서 불평하며 살아가는 길을 택한다. <출처: gettyimages>

그러나 잠깐 숨을 멈추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나는 점점 자유로워지고 있는가, 노예로 변해가고 있는가? 조직이 나를 버릴 지라도, 나는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있는가? 누군가 나에게 해야 할 일을 주지 않아도, 나는 하루하루를 오롯하게 보람 있게 꾸려갈 수 있는가?

자유인으로 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자유를 내던져 버리고 강력한 누군가의 밑에서 불평하며 살아가는 길을 택한다. 라보에티는 줄리우스 시저(Gaius Iulius Caesar, B.C. 102~ 44)를 독재자라며 미워했다. 그는 시저를 찬양하던 로마시민들을 더 싫어했다. 왜 그랬을까? 시저는 로마시민들에게 노예근성을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시저 이후, 로마는 민주주의를 회복하지 못했다. 불만이 생겨도 자신들을 다스릴 독재자가 바뀌기만을 기다렸을 뿐이다.

우리의 모습은 로마시민들의 모습과 얼마나 다를까? 삶에 불만이 많다면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보라. 그대의 삶은 새로운 주인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는 노예와 같지는 않은가? 반성하지 않는 삶은 금방 나락으로 추락해 버린다. 나는 과연 자유인인지 끊임없이 되물을 일이다.

안광복
소크라테스처럼 일상에서 철학하기를 실천하고자 하는 철학 교사. ‘소크라테스 대화법’ 연구로 서강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와 강연을 통해 철학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저서로는 ‘철학 역사를 만나다’ ‘열일곱 살의 인생론’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 등이 있으며 지금은 서울 중동고에서 철학교사로 일하고 있다.
홈페이지
http://www.joongdong.h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