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브러햄 링컨이 새디어스 스티븐스에게 말한다.
"나침반은 당신이 선 곳에서 정북(正北)을 가리켜줄 것이오. 하지만 그 길에서 만날 늪과 사막과 협곡은 알려주지 않지요. 장애물에 주의하지 않고 목적지로 내달리다 늪에 빠져버리면 정확한 방향을 안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대통령은 여당 거물을 설득하는 중이다. 노예 해방을 실현해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링컨은 공화당의 급진적 노예 폐지론자에게 "의견이 다른 이들을 모으려면 그들이 결심할 때까지 느리게 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새 영화 `링컨`의 한 장면이다. 영화는 링컨 생애 마지막 넉 달을 보여준다.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나기 전 노예제 폐지를 명시한 수정헌법 13조의 의회 통과를 이끌어낸 링컨의 정치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연방 하원에서 수정헌법이 통과되려면 의원(182명) 3분의 2 찬성이 필요한데 공화당이 똘똘 뭉쳐도 20표가 모자랐다. 하지만 공화당에서도 종전 협상에 관심이 많은 보수파와 노예제 폐지가 무산될까 조급한 급진파의 생각이 엇갈렸다.
링컨은 깊은 고뇌에 빠졌다. 내전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 꽃다운 젊은이들 목숨을 구할 것인가, 비참한 노예와 그 자손들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희생을 치를 것인가. 가야 할 길은 분명했지만 그를 가로막는 현실의 벽은 너무나 높았다.
하지만 결국 그는 2표 차 승리를 거두고 인류 역사를 바꿔 놓았다. 링컨은 재선에 실패한 민주당 레임덕 의원들 표와 공직을 거래하는 막후 공작까지 했다. 스티븐스는 "가장 위대한 법안은 부패 때문에 통과됐다. 이는 미국의 가장 순수한 사람이 꼬드긴 것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링컨의 리더십에서 가장 빛을 발한 것은 설득이었다. 링컨을 `에이브러햄 아프리카누스 1세 황제`라며 격렬히 반대하는 민주당 쪽에서 찬성 16표와 (의문의) 기권 8표를 끌어낸 것은 정치 공작보다는 설득의 힘이었다. 대통령이 밤중에 홀로 민주당 의원의 집 앞까지 찾아가 설득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링컨의 수염과 말투와 눈빛을 재현하는 대니얼 데이루이스의 연기는 일품이다. 그의 열연과 스필버그의 영웅주의로 영화 속 링컨은 실제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인간적인 지도자로 보일지 모르겠다.
물론 영화는 역사와 다르다. 우리는 할리우드가 보여주는 게 모두 진실이라고 믿지 않는다. 역사가 중에는 링컨을 마키아벨리 식 노회한 정치꾼으로 보는 이도 있다. 심지어 그가 진정으로 흑인 노예를 평등한 인간이라고 믿었는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노예 해방에 크고 작은 기여를 한 숱한 이들 중 링컨이 너무 많은 공을 차지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날 정치인들에게 영화 속에서 이상적으로 그려진 링컨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 링컨은 가장 익숙하면서도 가장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라고 한다. 150년 전 링컨의 민낯이 어땠는지 밝히는 건 사가들의 몫이다. 지금처럼 소통과 설득과 포용의 리더십이 절실한 시대에 이상적인 지도자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작가들이 할 일이다.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으로 재선에 성공한 버락 오바마에게 링컨은 남다른 감회를 줄 것이다. 그는 영화를 보고 "대통령으로서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쳐줬다"고 말했다. 의회 지도자들도 "정치의 올바른 길을 보여줬다"고 찬사를 보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고뇌에 찬 고독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링컨은 `고결한 성자와 같은 평민`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가장 높은 이상과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때로는 추하고 때로는 불결한 현실 정치를 멀리하지 않았다. 그는 국무장관에 임명한 정치적 라이벌의 말을 `세 귀를 모두 열고` 들었다. 목표는 뚜렷했지만 앞뒤 보지 않고 무작정 내달리지 않았다. 대의를 위해 작은 것은 양보했다. 한국 지도자들도 배울 게 많지 않을까.
[장경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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